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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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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ist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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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han
2000-05-28 02:20 13,70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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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o_clef.gif width="30" height="40" border="0"> 비올라에는 그 애호가나
아마추어들에게 사랑을 받는 어떤 매력들이 있다. 훌륭한 기교와 잊혀지지 않는 음색을
가진 뛰어난 전문 연주가의 손에서도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그럴 수 있지만- 비올라는
소비자 경제관계에서 단지 멋있는 예술애호의 구경거리로만 될 수 없다. 사랑과 애호의
면에서 비올라는 언제나 비주류의 악기였으며, 이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그 크기가 작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코드와 조화의 모델을 가지지 않고 끈임
없이 스타일을 창조하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으나, 현인들에 의해 비주류로서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바이올린은 전세계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단지 많기 때문에 주류가
아니라, 그것은 매우 특별한 이미지를 가진 모델이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반대로
모델을 가지지 않고 영속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이것은 위대한 사랑의 한 과정이다.
각각의 그리고 모든 비올리스트들은 그들 자신이 비올리스트가 된다는 의미를 각자
발견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올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비올리스트들
조차도 진실로 알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 잠재성은 언제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
우리를 앞으로 밀고 나간다. 그러므로 비올리스트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던지
간에(실제로 이것은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로 다가선다), 비올리스트는 언제나
이 특별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데, 롤랑바르트에 의하면 애호가들에게나 아마추어들에게
있어 세상은 모델에 의해 선점되어 있거나, 연주를 하면서 투사하는 이미지를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순수한 jouissance의 경험과 그 의문점의 핵심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비올라를 소유한다고 하지 않고, 비올라가
나를 소유한다고 말한다. 즉, 비올라가 나를 연주하는 셈이다.


alto_clef.gif align="left" width="30" height="40" border="0">내 비올라는 매우 가볍고 질 좋은
밤나무로 된 15인치 길이이며, 1987년 윌리엄 맥도걸에 의해 수제품으로 만들어졌고,
라벨은 넘버 7이다.  케이스의 안쪽은 회색 송아지 가죽으로 된 직사각형의
검정색 웨버 케이스이다. 나는 이 제품을 1994년 신비한 과르네리 일가에게서 구입하였는데(이
집안은 모든 현악기 연주가들이 알고 있는 거대한 가문으로서, 빅토리안의 위대함을
가지고 있으며, 깊은 새도우와 풍부한 동양 양탄자, 글래스 창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 가문의 관리관장에 의하면, 맥도걸은 선구자적인 심장 외과의로서 자신의 인내를
연마하기 위하여 현악기를 수제했다고 한다. 아마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아마추어에
의해 연주된 것으로 진짜 "비주류" 비올라인 것이다. 나에게 이 비올라는
첫눈에 마음에 들었고, 강렬하게 매혹시켰다. 이 악기는 특히 독특하게도 몸체가
다른 비올라와 달리 매우 가늘고(그리고 놀랍게도 특별하게 낭랑하였으며) 18세기의
이탈리안 바이올린의 확장된 버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올라는 내가 이전에
가졌던 강렬한 광채를 띤 비올라가 아니라, 부드럽고 미묘한 악기로서 온화하며 매혹적이며,
그 음색 또한 따뜻하다. 단단하고 진동하는 비올라 몸체는 매우 특별한 음색을 지니는데,
그 음색에는 연주자 자신의 육체와 근육과 세포막과 동공의 부풀어 오름과 악기의
달콤한 긴장에 메아리들이 함께 녹아져 있다. 청각의 몰입만이 아니라 육체의 관능이
있는데, 손가락 패드 밑의 현에 대한 부드러운 압력, 춤추듯이 비올라 활을 한번
켬, 진동과 홈통 사이에 공간을 채우는 나무로 마무리된 지상의 품격 사이로 팔과
손가락을 통해서 음률이 흐른다. 아마추어의 예술은 그녀의 몸체에 다가서고, 그
음색은 들리지 않는 그녀 자신 내부의 소리들의 휘저음과 섞여있다. 홀로 함께, 비올라와
비올리스트(바이올린과 그 연주자와는 달리)는 사회적 정체성과 개인성을 잊어버리게
되고, 신체적인 독특성과 순수한 경험, 매혹적인 열정의 흐름에 빠져들게 된다.


   비올라가 개인의
삶에 들어설 때, 그녀 혹은 그는 결코 그대로 정체될 수 없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일련의 비약과 존재에 대한 긴 투쟁, 매우 다른 열정들을 가진 비올라 공동체
사회에서의 유사한 투쟁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하는 데 착수하게 된다. 만약 음악가들의
그 공동체 사회가 실제로는 스타의 연주와 이미지와 모델의 생산과 교환을 하는 주류의
소비자 경제 관계에 있다면, 비올리스트가 음악가의 공동체 사회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사실이나, 한편 역설적으로 그녀 자신을 음악가들의 공동체 사회가 아닌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비올리스트는 처음부터 그녀의 비올라가 느끼는 낯설고 흥분되는
무아경 속에서, 그녀의 악보의 독특한 음자리표에서, 다른 이들의 그녀에 대한 태도에서
그녀가 전통적인 의미의 연주가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비올라에는 거칠고
신비스럽고, 파괴적인 면과 이러 저리 흘러 다니고, 재빨리 정착하는 유목민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나 비올리스트들이 이런 것들을 깨닫기에는 때로 수년이 걸린다 -
음악 공동체 사회와 조직 안에서 수년간의 억눌림, 경쟁적인 연습과 공연에 대한
일상적인 걱정과 욕망에 의해 난타되고, 수년 동안의 순응에서 그 자신의 개념이
다른 음악가들의 사회적 압력에 노예화되어 비올라 자체의 거센 요구를 잊어버리게
되고, 아마추어와 악기 사이에 꽃 피우고, 번창할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눈부시게 출현할  때 비올리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과 음률과 육체의 공감각적인 혼합과 자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석수정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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